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이라노 마사카도 (문단 편집) == 평가 == 일단 반역자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만한 반란을 일으킬 정도의 세력가였으니[* [[헤이케모노가타리]]에서 중국의 [[조고]], [[왕망]], [[주이(양나라)|주이]], [[안녹산]], 일본의 [[https://ja.wikipedia.org/wiki/%E8%97%A4%E5%8E%9F%E7%B4%94%E5%8F%8B|후지와라노 스미토모]],[[https://ja.wikipedia.org/wiki/%E6%BA%90%E7%BE%A9%E8%A6%AA|미나모토노 요시치카]], [[https://ja.wikipedia.org/wiki/%E8%97%A4%E5%8E%9F%E4%BF%A1%E9%A0%BC|후지와라노 노부요리]]와 함께 한때 잘 나갔으나 반란을 일으켜서 훅 간 권신이라 언급된다.] 자연히 당시 사람들에게는 '''절세의 호걸'''로 여겨졌으며, 일본의 [[원령 사상]]과 결합되어 마사카도를 숭배하는 움직임이 생겨나 [[민간 신앙]]으로 발전했다. 특히 그가 기반했던 반도(坂東: [[간토]])는 옛날부터 수도로부터 촌구석, 미개지역 취급을 받던 곳이라 그 일대에서는 수도인 교토 정부의 횡포에 대항하는 영웅으로 떠받들렸다.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일본 천황의 존재와 그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일본의 역사, 사회에서 놓고 볼 때 좀 삐딱하게 말하면 '머리가 깬 사람'에 가까웠다. 일본의 천황은 [[맹자]]의 천명사상, 역성혁명론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유교적 정치문화 측면에서 보면 꽤나 이질적인 존재이다. 한국이나 중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 다른 왕조 국가들과 달리, [[진승]]의 [[왕후장상 영유종호]]라는, 민중에 의한 혁명과 왕조 교체를 긍정한(나아가서는 전근대적인 신분제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이어질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게 되는) 그 유명한 말이라던가 "정치 똑바로 못하면 하늘과 백성의 이름으로 왕을 갈아치워야 한다"는 천명사상, [[역성혁명]]론으로 대표되는 맹자의 사상이 유독 현실 정치에서 좀처럼 통용되지 않았던 경우가 일본의 천황이다.[* 다만 "너 정치 똑바로 못하면 갈린다"는 맹자의 사고방식 자체는 일본에도 분명히 존재했고 긍정되었다. 당장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사서를 다 읽기 힘들면 맹자만이라도 읽어야 한다'''"고 했던 맹자 애독자였다. 메이지 유신도 그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요시다 쇼인]]이 맹자를 강의했다거나 그 문하생인 [[타카스기 신사쿠]]의 [[기병대]] 역시 맹자의 '하늘과 백성의 이름으로 실정하는 국왕을 갈아치운다'는 천명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로 '''일본 역사에서 맹자가 '위력'을 발휘한 몇 안 되는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후지와라 세이카]] 이래 맹자 중심의 신유학인 성리학이 일본에 본격 보급되고 도쿠가와 막부 시대를 거치면서 연구가 심화됨에 따라, 막부 말쯤 되면 [[시부사와 에이이치]] 등을 비롯한 유신지사들 중 많은 사람이 맹자 정도는 기본 교양으로 다 알고 있었고, 유교적 이념에 따르면 문제가 많은 천황-막부 이원 구조에 대한 불만도 이로 인해 증폭되었다. 시부사와 같은 인물은 아예 맹자를 직접 읽다가 혁명을 부추기는 구절에 영향을 받고서 막부를 타도하려는 무리를 소집했던 사람이다. 문제는 "너 정치 똑바로 못하면 갈린다"의 대상이 어떤 경우에는 천황이 되지는 않았다는 점이고, 이는 천황이 실권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차이가 없었다.] 이에 대해 혹자는 "일본의 경우는 집안 족보를 따지고 보면 황실 후손이라서 천황을 건드려 자기 정통성을 훼손할 필요가 없었다"[* [[쇼군]]은 56대 [[세이와 덴노]]의 후손인 세이와 카와치 [[겐지]] 계통([[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아시카가 다카우지]],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이 관례적으로 차지했고, 유사시라도 황가, 황실의 오랜 외척인 [[후지와라]]가,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간무 [[헤이시]]의 인물을 데려오려고 했다. 이것이 바로 <<[[맹자]]>>에서도 말하기를 "[[순]] 임금은 동쪽 오랑캐 사람이고, [[문왕]]은 서쪽 오랑캐 사람이다"하는, 대놓고 혈통이 다른 걸로 소문이 다 나서 [[천명]]을 명분으로 [[선양]] 혹은 [[역성혁명]]을 통해 집권할 수밖에 없었던 중국 등의 경우와 다른 점이다.]거나, "중국도 역성혁명을 하면서 자신들의 집안 혈통을 윤색하고 왕후장상이라는 신분제를 부정하지 않았다"[* 주로 자신이 [[삼황오제]] 중 누군가의 후손이라는 프로파간다,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개중에서도 자기 집안이 황제 해먹을 차례라는 프로파간다 등을 애용했다.] 는 점을 이유로 전근대 신분제 부정의 토대가 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하지만 그 의의는 더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맹자의 천명설, 혁명론이나 진승의 구호가 물론 '왕후장상'으로 대표되는 '신분 제도' 자체를 전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라지만, 그러한 '신분'이 태생이나 어떤 이유로 해서 고정불변한 것이라고 정의하려 드는 선민사상적인 인식이나 혹은 그러한 신분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부여되는 특권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동시에 그러한 '신분'간의 유동성을 긍정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혹자는 민본주의의 한계점인 "새 권력자 1인 혹은 새 권력층의 집권 명분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제도적, 정치문화적으로 현대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하게 자생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을 들며 "민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친화적으로 연결해 이해하려는 시도는 어디까지나 근대 서구의 충격이 있은 이후에나 출현"한 것이니 "현대 민주주의로의 발전을 위해서 결국 외부적 충격을 기다려야 했다는 교훈에 주안점을 두어야 하겠다."며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는 것을 기준삼아서 외부적인 요인만을 강조하려고 드는데, 애초에 그 기준으로 제시되는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는 것도 민주주의의 '태동기'부터 '현대'라는 시간대에 이르는 과정에서 기존에는 '문제점'이라는 인식도 없었던 것들이 '문제점'으로서 서서히 인식되고 수용되며 보완되는 과정들을 거쳤고, 동시에 단지 문제점으로서 '인식'되지 않았을 뿐 여전히 '현대 민주주의'에도 그 '보완점'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현행 민주주의 체제를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 운운하며 고정불변의 원칙으로 삼아 민본주의를 평가절하하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예를 들어 로마의 성산 사건과 함께 '능동적으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 시민의 역할과 권리를 보장, 증대'했다는 평가가 존재하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으로는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이 된) '여성 참정권'은 ''''말 같지 않은 헛소리''''로 여겨졌을 뿐 아니라 근현대에 해당하는 19-20세기에 들어서까지 그것을 용납하지 못한 국가가 '민주주의'가 뿌리내렸다는 구미권에 상당히 많았다.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의 전범이라고 할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참정권이 허용된 것은 18세기, 19세기 같은 근대도 아니고 역사 연구에서 '현대'로 분류되는 20세기 [[1965년]]의 일이었다. 국제학계나 시민의식의 도태니 고립이니 하는 거창한 말은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현행 민주주의 체제를 민주주의 그 자체로 동치시켜서 아예 고정불변한 도그마로 만들려는 사람들에게나 더 어울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민본주의 아래 백성은 '시민 사회'라는 것을 구성하고 체계화하고 운영할 생각도 능력도 인프라 등 여타 여건도 없었다며 '시민 사회의 적극적 활동'을 민주주의의 제3의 요소 운운하며 민본주의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역시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는 잣대로 민본주의를 어떻게든 평가절하하려 하려는 자들도 있는데, 민주주의라고 해서 그러한 '시민 사회의 적극적인 활동'이 처음부터 긍정되었던 것은 아니다. '시민 사회의 적극적 활동'이 단지 혁명 정부의 개악된 지방 정책 수립에 대한 반발과 항의라는 모습을 띠었다는 이유만으로 철저하게 짓밟히고 공화주의를 부정하는 '반동'으로 매도당해 20세기에 들어서까지 온갖 비난을 감수해야 했던 [[방데 전쟁]]의 피해자들은 사건 이후 300년이 지난 현대,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이 존재하는 21세기에조차 어떻게 해석해야 될 것인지 당장 프랑스 본국에서조차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떻게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그럴 수가 있느냐?"라는 비난과 조소를 듣기 충분한, 민주주의의 흑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에 대한 '재조명'도 이러한 문제점들을 '문제점'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던 풍조가 서서히 변화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재해석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며, '시민 개개인의 적극적이며 자유로운 각양각색 의사의 개진과 취합에 따른 체제'라는 현대 민주주의라는 것도 그러한 형태를 이루기까지 진화생물학처럼 그러한 다양한 논의와 재해석, 시행 착오와 보완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중인 어떻게 생각하면 매우 불완전한 동시에 완전한 것이고 그 자체가 처음부터 완성되어 등장한 고정불변의 완벽한 결과물은 아닌 것이다. 그걸 가지고 현대와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평가절하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센고쿠 시대에 온갖 신분 세탁과 족보 위조를 통해서 등장한 유력 다이묘들이 자신은 천황의 먼 친척이네 어쩌네 하면서 천황 자체를 부정하거나 하지는 않았고[* [[헤이케]] 후손을 자처한 [[오다 노부나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라이벌이며 같은 [[겐지]] 일족인 [[닛타 요시사다]]의 후손을 자처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이 대표적이다. [[헤이케]]의 경우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출신이 의심스럽다' 소리를 듣기도 했는데, 평민이면서 귀족 후손인 것처럼 족보를 위조했다는 게 아니라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생모인 기온노 뇨고가 원래 [[시라카와 덴노|시라카와인]]의 후궁이었다가 다다모리에게 하사된 인물이라서 기온노 뇨고가 낳은 기요모리가 사실은 다다모리의 아들이 아니라 시라카와인의 사생아라고 수군댔다는 것이다. 이는 시라카와인이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서 다이라노 다다모리 같은 이세 헤이시를 끌어들여 고위 관직을 주고, 일개 무사의 신분이었던 다이라노 다다모리를 덴조비토로 승진시킨 것뿐 아니라 그 아들인 기요모리는 원복하자마자 종5위 관위를 주고 나아가 정4위상이라는 당시 무사로서는 과분하다고 할 정도로 황족에게나 베풀 법한 특전을 받았기에 그것을 후지와라 씨 등 기존의 귀족들이 뒤에서 씹고 까느라고 "기요모리가 다다모리의 친아들이 아니고 사실은 시라카와인의 사생아였다"라는 썰을 지어내 퍼뜨린 것이다. 이는 노부나가나 이에야스와는 분명히 다른 점이다.], 진승이 비록 나중에 자신을 왕의 후손으로 윤색하기는 했지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더냐'라는 진승의 말은 전근대적 신분제가 내세운 '''신분의 고정불변성'''에 대한 명시적인 부정이라는 점에서 "'''[[대깨|일본의 군주는 하늘이 무너지고 집안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오직 천황의 일족만이 될 수 있다]]'''"고 못박았던 일본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어떤 사회의 변혁은 전에 없던 뭔가 '혁명적인' 어떤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사상이나 묻혔던(혹은 당대에는 부정당했던) 이론을 시간이 흐르면서 시대의 변화상에 맞추어 '재해석'하는 과정 혹은 '재발견'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당장 현대 민주주의의 모델이 태동한 서구만 해도 현대와 같은 민주주의의 모델을 갖추는 과정에서 신분제에서 기인한 차별 의식, 고정불변의 것이라는 선민사상이 완벽하게 바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단순히 민주적 형태의 의회를 세우는 것도 모자라 [[루이 16세|자신들의 머리에 앉은 왕]]을 끌어내리고 재판에 회부해 목을 날려버리기까지 하는''' 급진적인 사태에까지 치닫고도 결국 [[테르미도르 반동|왕정이 일시적으로나마]] [[나폴레옹|복고되었던]] [[프랑스 대혁명]]이나 [[미국 독립 혁명]]도 그 자체로 전근대적 신분제를 완벽하게 부정하고 떨쳐내는 데까지는 여러 진통을 겪어야 했고, 현대 민주주의에서 당연한 상식이 된 [[여성 참정권]]을 비롯해 노동자나 부르주아나 귀족이나 인종, 장애 여부에 상관없이 인민 모두에게 동등하게 투표권이 주어져야 한다는 사상은 서구에서도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고도 한참 뒤에나 이루어졌다. 이것은 어떤 의미로는 사람들의 고정관념, 시대와 사회의 한계라는 것이 넘기 어려움을 보여준다.][* 사실 어떤 사회의 변혁이 아래로부터의 혁명보다는 위에서부터 조금 생각이 깨어 있었던 이들 몇몇으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 아울러 [[한 고조]]나 [[홍무제]]처럼 밑바닥으로부터 시작해 위에 올라선 이들이 더 발작적으로 신분제에 집착해 더한 짓을 벌이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실제 사례가 있다. 하지만 그들을 예로 들며 "진승, [[만적]] 같은 '근본 없는 것'들의 대다수는 그냥 난 일으킨 역적으로 몰살당해버리고 2500여 년 내내 민주주의와는 하등 상관 없는 분열-통일-숙청-전제-부패의 단일 패턴을 반복하였다"고 그것을 마치 주지의 통설인 것처럼 주장할 수는 없다. [[진승]] 항목에 나오듯 진승은 한나라 조정에서 결코 마냥 '근본도 없는 주제에 기어오르려 들었던 것'으로 치부되었던 적이 없었고, 홍무제가 신하들을 잔인하게 숙청하긴 했어도 맹자 나아가 유교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또 백성에 대한 빅브라더식 감시망을 만들어 통제를 강화한 것이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에서 보면 분명 인권 침해이긴 했어도 동시에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관리의 부정부패를 감소시키는 데에 효과가 있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31340|#]] ] "기존의 전근대 왕조 체제를 유지하며 마치 저 북쪽의 '인민의 총의'와 같이 집단주의적으로 추상화된 '민심'을 그 대리인인 '수령/장군/위원장' 비슷한 유덕자(라고 선전된 사람), '군자'에게 위탁하는 정치 형태가 동아시아 2500년 역사 내내 지속되었다"느니 "이때 민심이라는 것은 천인감응, 민귀군경 등의 수사적 표현을 통해 명분상으로는 군림하되, 실제적으로는 통치하지 못한다. 웃기게도 어찌 보면 천황과 비슷한 신세다."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일본 역사에 대한 이해 부족뿐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 민본주의를 지나치게 현대적 관점에서 곡해, 왜곡하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집단주의적으로 추상화'되었다고 치부해 버릴 '민심'이라는 것이 입을 옷이 없어 모기장을 뒤집어쓰고 살든 즉위식 치를 돈조차 없어 글씨를 팔고 성금을 받아 연명했던 천황과 달리 동아시아에서 사회를 움직이는 분명한 한 축으로 작용하며 크고 작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천명사상이나 역성혁명론은 신분 자체를 완벽하게 부정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현대의 민주주의와 차이가 극명하지만,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 권력의 작동 원리와 그 형성, 유지에 '하늘'이라는 형체 없고 불가지한 동시에 전지전능한 것으로 여겨지던 존재뿐 아니라 '백성'이라는 현실의 존재를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일본의 천황과는 분명하게 결을 달리한다.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이라 불리는, '''하늘과 인간은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연 현상과 인간의 행위 사이에는 명백한 인과 관계가 존재한다'''고 보는 유교적 천명사상과 역성혁명론은 전근대 사회에서 권력자가 피지배층을 멋대로 착취하지 못하게 하는 사상적인 안전장치인 동시에 그 피지배층에 대한 권력자의 다스림이 충분하지 못할 경우 하늘이 자연 현상을 통해 권력자의 '부덕'을 심판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권력자를 갈아 치워버릴 수도 있음을 긍정한다. 누구처럼 "민본주의라는 것도 피지배층 착취 방지의 안전장치라고 하지만 사실상 최고지배층(군주)을 중간지배층(귀족)이 명분상으로 압박하는 용도로 기능하는 바가 더 컸지 않느냐"는 냉소는 위정자들이 그렇게 '''표면적으로나마 피지배층을 위한 '안전장치'를 만들 수밖에 없게끔 압박을 가한 사회적 공기'''는 무엇에서 기인하였는가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맹자가 "군자의 과오는 [[일식]]과 같아서 저지르면 백성이 지켜보고 고치면 백성이 우러러 본다."는 말을 반민주적 정치관에 속박된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단장취의에 가까운 억측인데, 해당 구절의 청자는 백성이 아니라 군자이다. 백성이 군자로 표징되는 위정자를 우러러 본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군자로 표징되는 위정자가 어떤 과오를 저지르면 하늘의 일식이나 월식처럼 백성에게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고'''(즉 군자의 과오를 백성 앞에 숨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군자라는 존재는 그 자신의 과오를 고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백성에게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크다고, 잘못한 것을 숨기려고 하지 말고 드러내고 고치라고 권하는, 현대 민주주의 원칙에서도 충분히 도덕적 경구로서 수용이 가능한 위정자로서의 자세를 강조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당초에는 좋은 의도로 도입되었던 제도가 나중에 가서는 악용되는 경우도 많다는 점에서 피지배층 착취 방지의 안전장치, 명분상 압박하는 용도 운운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주객전도'에 가깝다. 민본주의나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 정의를 분명히 하겠다는 이유로 민본주의를 필요 이상으로 평가절하하고 민주주의 특히 현대 서구식 민주주의 원칙만을 절대적인 동시에 고정불변의 것으로 떠받드는 것은 그 자체가 동양을 '깨지 못한' 존재, 계몽해야 할 미개한 존재로 취급했던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비교는 단순하게 1대 1 또는 지금의 기준만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다. 다이라노 마사카도를 '머리가 좀 깬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논지에 대해 "마사카도가 운위한 천명론은 고대적 민본주의이고 현대 민주주의 원칙의 기준으로 그 민본주의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며 마사카도를 '좀 깬 사람' 운운하는 것은 반발을 불러온다"는 말은 적어도 마사카도라는 인물과 천황이라는 존재를 운위함에 있어서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봉기에 그가 거점으로 삼고 있던 반도 지역의 백성들이 대부분 호응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며, 마사카도가 사후 역적으로 몰리고도 여전히 반도 지역에서 그를 영웅으로 받드는 전설이나 민담이 전승되었다는 것은 "민심이 천명인지 그냥 못된 역심인지를 판정하는 것은 지배층끼리 자기 셈에 따라 아옹다옹하며 결정하는 것"이라는 일부 논자들의 민본주의에 대한 냉소 자체를 비웃기 충분하다.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 운운하며 백성의 수동성을 운위하지만 엄연히 중앙 정부로부터 '역적'으로 몰린 인물을 긍정적으로 전하는 전승 자체가 그러한 긍정적 전승의 내용이 실제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에 상관없이 그러한 전승을 공유하는 이들의 강렬한 의지가 반영된 산물이고 '권력에 대한 능동적 저항'이라 부르기 충분한 것이다. 애초에 민본주의를 평가절하한답시고 백성을 '폭정이 있은 연후에야 지배층에 대한 불만으로 반응하고 덕정이 있은 연후에야 지배층에 대한 찬양으로 반응'한하는 존재로 정의하며 그것을 시민과는 다른 '수동성'이라고 평가절하하는 문장도 이율배반적이다. 폭정이라고 표징되는 위정자의 실정에 불만으로 반응하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으로 분명하게 보장된 저항권의 일종이고, 덕정이 있은 연후에 지배층에 대한 찬양으로 반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동성이 아니라 인과율에 따른 필연적인 귀결이다.] 천황이라는 존재가 일본 사회에서 어떤 위치이고 그 천황을 정점으로 세워진 일본이라는 나라의 사회 구조가 어떤 사상과 이념으로 이루어졌는가를 짚어보는 과정에서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존재는 분명히 이색적인 존재인 동시에 이단적인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그 수많은 잇큐잇키도 마사카도처럼 체제 자체를 부정하거나 일본이라는 지배 체제를 이탈해 독립하려 한 것이 아니었고, 모기장을 뒤집어쓰고 살든 돈 없어 글씨 팔아 연명하든 '천황은 신성불가침적 존재'라는 명제를 고정불변의 절대적 진리로 여기며 부정하려 하지 않았던 일본 사회에서 다이라노 마사카도 이외에 일본 역사에서 그 어떤 인물도 그러한 일본의 지배 체제와 사회 구조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기를 들 생각을 할 인물은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민본주의는 위정자와 백성을 '대립'하고 '양립'하는 이분법적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 또 받을 수 있는 모종의 계약 관계로 간주하며, 위정자의 권한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시점에서 무한정이고 고정불변의 것이라거나 백성이 마냥 위정자의 지배를 받아 들여야만 하는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관계라는 사상을 부정하는 것이 민본주의이다. 지배자는 마냥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신성한 권력을 피지배자인 백성에게 마냥 행사하고 군림하기만 하면 되고 피지배자는 그러한 지배자의 군림을 '신의 뜻'이라고 수용해야만 하는 신민이 아니라 상호간에 각자의 생존과 행복을 위해서 권한을 위임하고 위임받은 일종의 '계약' 관계이며, 그 지배자의 엇나간 정치로 인해 피지배자가 생존과 행복을 위협받을 경우 그 지배자와의 계약을 철회하고 다른 이로 바꿀 수 있다는 사상은 [[왕권신수설]]의 토대를 마련한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이후 서양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홉스]]가 [[사회계약론]]을 주창하기까지 거의 천 년을 기다려야 했다. 위정자가 부여받은 것과 같은 '천명'의 또 다른 상징으로서의 인민의 존재를 '발견'해낸 것이 맹자와 민본주의의 가장 큰 업적이고, 이는 서구 민주주의 발달사에 비추어 생각해도 분명히 획기적인 사상의 전환이었음은 틀림없다. 백성이 위정자에게 있어서 천명의 대변자이기는 하지만 그 위정자도 백성과 마찬가지로 '천명'을 명분으로 존재하고 위정자가 위정자의 위치에서 자신이 해야 할 책무를 다하지 않아 백성이 도탄의 빠지게 되는(즉 위정자가 위정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 위정자의 자리를 담보하는 천명은 백성의 민심과 마찬가지로 변화할 수 있고 위정자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당위성마저 부정된다, 라는 식의 사상은 굳이 자본주의 맹아론이니 하는 말을 가져오지 않아도 그 자체로 맹자 당대뿐 아니라 현대의 기준에서도 분명히 '혁명'적인 사상이라고 평가받아 마땅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분제를 부정하거나 고정불변성을 부정하기는커녕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오히려 그것을 '중국과 다른 우리만의 특별함'[* 혹자는 동아시아의 민본주의를 현대 민주주의 원칙으로 평가절하하는 입장에서 "기존의 전근대 왕조 체제를 유지하며 마치 저 북쪽의 '인민의 총의'와 같이 집단주의적으로 추상화된 '민심'을 그 대리인인 '수령/장군/위원장' 비슷한 유덕자(라고 선전된 사람), '군자'에게 위탁하는 정치 형태가 동아시아 2500년 역사 내내 지속", "2500여 년 내내 민주주의와는 하등 상관 없는 분열-통일-숙청-전제-부패의 단일 패턴을 반복하였음이 주지의 사실"이라느니 말하는데, 그게 따지고 보면 동아시아 국가의 민본주의의 실상이라기보다는 그냥 일본이라는 나라의 현실 그대로였다.]이라고 여기는 인식을 중국 황제 앞에서도 대놓고 "우린 원래 이래요, 부럽죠?" 이러고 자랑하던 것이 일본이다. 천황의 조정이나 막부의 쇼군이라고 그러한 천인상관설을 몰랐거나 혹은 '웃기고 있네' 정도로 치부한 것은 아니어서 국가 재난 사태에는 으레 '덕정(德政)'이라 불리는 국가적 대책들이 시행되었다.[* 이 점은 전근대 중국이나 한국의 왕조 국가에서 시행한 여느 정책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천황의 경우 '''하늘과 백성을 거스르고 실정을 일삼는 왕의 덕이 쇠약해지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다른 데로 옮겨갈 수도 있다'''는, 동시에 '''누구든 왕의 자리에 오를 만한 힘이 있는 자는 누구든 그 왕의 자리를 힘으로 쟁취할 수 있다'''는 사고는 한국이나 중국과는 달리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라는 일본 신토의 최고 신이자 온 세상을 비추는 [[태양]]의 여신이 자신의 손자 니니기를 지상에 내려 보내며 "'''지상은 니니기와 그 후손이 영원토록 다스릴 땅이다'''"라는 이른바 '천양무궁의 신칙'에는 니니기와 그 후손에 대한 세상을 다스릴 권한에 대한 '약속'만이 있을 뿐이지, 그 권한을 '리콜'할 수 있는 장치는 없다. 아무리 정치를 엉망으로 해도, 무모한 전쟁을 벌여 수천 수백의 목숨이 죽어나갈 망정 일본의 군주 자리에는 오로지 천황의 일족만이 오를 수 있었고, '천양무궁의 신칙'으로 하늘로부터 받은 천황의 황권에 리콜하거나 회수할 권리는 고사하고 이의를 제기할 존재는 일본 안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 권한을 준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마저도 그런 건 생각도 하지 않는다. [* 이러한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와 천황의 관계는 비유하자면 구약의 [[야훼]]와 [[이스라엘 왕국]]의 왕들의 관계와 비슷한데,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신황정통기에는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나 일본 신토의 신들이 천황의 자손에게 천황을 그대로 잇게 하는 것은 ''''인간은 도를 벗어나고 약속을 쉽게 저버려도, 하늘은 도를 벗어나지 않고 한 번 한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해석되어, 아마테라스가 니니기에게 했던 천양무궁의 신칙이라는 신대의 서약을 그대로 지키고 있으므로 결국 천황의 자리는 [[무로마치 막부|힘 있는 자]]가 아니라 [[고무라카미 덴노|정통성을 가진 자]]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음을 역설하기 위한 것이다. 야훼 역시 [[다윗]] 이후 이스라엘 왕국의 역대 왕들을 보면 예언자의 말 따위 무시하며 야훼를 믿지 않고 이방의 신들을 믿거나 하는 등 야훼의 뒷목을 잡게 만든 인간들이 줄줄이 왕으로 즉위하지만, 그럼에도 야훼는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고 했던 때처럼 다윗 왕가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위를 거두어 다른 가계로 옮겨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다윗 왕의 후손들이 잇게 하는데, 이는 야훼 스스로가 "내가 너를 왕위에 앉히고 네 후손 대대로 왕 노릇 하게 하리라"(시편 89:4)라고 했던 야훼 자신이 다윗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다윗 왕의 후손으로서 세상 모든 인류의 대속과 구원을 위해 나타날 나자렛 목수의 아들]]의 등장의 복선이기도 하다)고 해석되며, 지카후사의 천황관과 비슷한 점이 있다.] 이런 점에서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당시 일본 사회에서 상당히 이색적이고 파천황적인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동아시아에서 전근대 신분제의 부정을 불완전하게나마 한때의 구호가 아닌 체제로 실현한 건 서구의 체제를 수입해 이식한 근대 일본이 최초이지만, 그렇게 서구의 체제를 수입해 이식했다는 근대 일본은 끝내 한국이나 다른 나라와 달리 [[다이쇼 데모크라시|아래로부터의 힘으로 자신들의 체제를 개혁하지도 못했고]], 그렇게 불완전하게 도입된 서구의 체제를 독재 정권에 대한 비판, 항쟁이라는 방식으로 자기화해가며 뿌리를 내리게 하는데 성공한 한국과 달리 일본은 그러한 서구의 '민주주의'라는 체제를 자기화할 이유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앞에서 설명한 여성 참정권도 일본은 태평양 전쟁으로 깔끔하게 패망한 뒤인 1946년에나 시행되었다. 한국이 불완전하나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장(1919)에서 남녀 모두의 참정권을 인정한 것과는 대조되는 것이다. 혹자의 견해처럼 "대통령 선출을 일종의 5년 주기 역성혁명으로 등치하여, 사실상 괘씸한 왕과 붕당을 5년에 한 번 심판하고 좀 덜 괘씸한 왕과 붕당에 또 다른 5년을 일임할 뿐"이라고 한국의 현행 정치 양상을 단순히 비판하는 것을 넘어 '본질적 전근대성'으로 규정한다면, 천황이라는 존재에 대한 전근대적인 신성불가침성이 공공연하게 온존하며 심지어 특정 정치인이 대를 이어 정치에 뛰어드는 것을 넘어 아예 특정 지역의 지역구마저 대대로 세습하다시피 하며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루스 베네딕트가 그의 저서 [[국화와 칼]]에서 일본의 모습을 "'''일본 역사의 전체 기간을 통틀어 현저한 계급 [[카스트]]적 사회'''"라고 분석한 그대로인) 일본의 '본질적 전근대성' 역시 만만치 않다.][* 그리고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비견할 만한 파천황적인 인물이 나중에 한 명 더 나오는데, 바로 [[고다이고 덴노]]이다.] 일본의 NHK에서 만든 역사 다큐멘터리 [[그때 역사가 움직였다]]에서는 마사카도가 자신의 영지에서 농민들과 함께 대부분이 삼림 지대였던 땅을 개간하면서 철제 농기구를 생산해 보급하고, 영지에서 많은 수의 말을 길러 군사적으로 활용했으며 오늘날 알려진 것과 같은 휘어진 형태의 [[일본도]]를 만들어 보급하는 등 군사적 개혁도 행했다고 설명한다. 또한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을 진압한 다이라노 사다모리나 후지와라노 히데사토, 미나모토노 쓰네모토[* 마사카도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조정에 고발했다가 무고죄로 처벌되었던 것을 반란이 일어난 뒤에 '그가 고발한 것이 무고가 아니라 사실이었다.'며 조정이 그에게 종5위 관위를 주었다고.] 등의 후손들이 [[국가유공자]]로서 [[이세 헤이시]]나 [[카와치 겐지]] 등 네임드 무사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헤이케]] 정권과 [[가마쿠라 막부]], 그리고 이후 무사정권의 수립에 대해서도 한 다리 걸친 셈이다. 센고쿠 시대의 [[오타 도칸]](太田道灌)이나 [[호조 우지쓰나]](北條氏綱) 등의 무장들도 간다묘진에 무운을 빌기도 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세키가하라 전투]]를 앞두고 간다묘진에게 전승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으며 에도 막부가 들어선 뒤에는 아예 간다묘진을 에도의 수호신으로 모셨다.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의 시대에는 칙사로서 에도에 내려왔던 다이나곤(大納言) 가라스마루 미쓰히로(烏丸光廣)가 막부로부터 마사카도의 업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조정에 호소해 역적이라는 이름도 제거하게 했다.(물론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무너진 뒤에는 가차없었다.) 에도 막부가 마사카도를 유난히 숭배한 것은 조정에 대항했던 다이라노 마사카도를 막부의 수호신으로 삼음으로써 조정을 정치에서 배제하겠다는 의도가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 간다묘진의 현 위치는 에도 막부가 옮긴 것으로 에도성의 동북쪽 귀문(鬼門)에 해당하는 곳에 해당한다고. 모로 미야가 쓴 헤이안 일본이라는 책에 보면 [[메이지 덴노]]가 살아서 '''몸소 참배한''' 두 곳이 [[야스쿠니 신사]]와 마사카도의 [[간다묘진]]이었다고 적었다. 물론 조정에 반역했던 자에게 천황이 머리를 숙인다는 것이 아무래도 정서상 용납될 수는 없는지라 [[1884년]]에 [[메이지 덴노]]가 간다묘진을 참배할 때는 마사카도의 신위는 신사 본전에서 빼서 경내의 섭사(부속신사)로 옮기고 본전의 빈 자리에는 원래 있던 오쿠니누시 신령과 짝을 맞추어 스쿠나비코나 신을 권청해 모셨다. 마사카도가 간다묘진의 본전으로 돌아온 것은 [[1984년]]으로 섭사에 들어간 지 백 년만의 일이었다. 2014년에 일본의 모 여성잡지에서 '가장 끔찍한 악당' 4위로 꼽히기도 했다. 1위는 [[아케치 미츠히데]]... 판단은 각자 알아서.[[http://www.nocutnews.co.kr/news/4070549|#]] ~~2위는 하필 [[오다 노부나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